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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아니라 취약함을 숨기게 만드는 사회

by 커브 2026. 1. 16.

현대 사회에서 질병은 점점 더 공개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지만, 취약함은 여전히 숨겨야 할 상태로 남아 있다. 병명은 말할 수 있어도 쉽게 지치고 흔들리는 상태를 드러내는 일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글은 왜 오늘날 사람들이 질병보다 취약함을 더 숨기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개인의 태도가 아닌 사회적 구조에서 살펴본다.

 

질병이 아니라 취약함을 숨기게 만드는 사회
질병이 아니라 취약함을 숨기게 만드는 사회

 

질병은 설명될 수 있지만, 취약함은 설명되기 어렵다

질병은 사회적으로 인식 가능한 언어를 갖고 있다. 진단명, 검사 결과, 치료 계획은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러한 언어는 질병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와 치료의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아픔은 발생한 사건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일정 부분 정당화된다. 반면 취약함은 명확한 언어를 갖기 어렵다. 쉽게 피로해지는 상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태, 회복이 더뎌진 상태는 진단명으로 포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태는 설명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여겨지고, 개인의 성향이나 능력 문제로 해석되기 쉽다.

이 차이는 표현 가능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질병은 말할 수 있지만, 취약함은 말하기 어렵다. 질병을 말하면 이해와 조정의 가능성이 열리지만, 취약함을 말하면 평가와 판단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질병의 언어로만 설명하려 하거나, 아예 설명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취약함은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취약함을 숨기게 만드는 정상 기능 중심의 기준

취약함이 숨겨지는 또 다른 이유는 사회가 정상 기능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기준에서는 취약함은 기능 저하의 신호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 기능 중심의 기준이 회복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약함은 종종 회복이 필요한 상태이지만, 기능이 유지되는 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기능 수행 의지의 부족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취약함을 숨기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아직 일을 할 수 있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상태를 드러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 판단은 취약함을 누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취약함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개인 내부에 축적된다. 이는 급격한 붕괴보다, 장기적인 소모와 회복 지연으로 나타난다. 취약함을 숨기는 사회는 질병을 줄이기보다, 더 깊은 소진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취약함을 개인의 문제로 만드는 구조의 한계

취약함이 숨겨지는 사회에서는 그 원인 역시 개인에게 귀속되기 쉽다. 쉽게 지치는 이유, 회복이 느린 이유는 개인의 체력이나 정신력 문제로 해석된다. 이 과정에서 환경적·구조적 요인은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난다. 그러나 취약함은 개인의 고유한 결함이라기보다, 조건의 변화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지속적인 과부하, 회복 없는 일정, 불안정한 환경은 누구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취약함이 개인의 문제로만 해석될 경우, 구조는 점검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취약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이중의 부담을 준다. 상태 자체의 어려움에 더해, 그 상태를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하는 부담이 추가된다. 그 결과 취약함은 더욱 말해지지 않게 된다. 결국 질병이 아니라 취약함을 숨기게 만드는 사회는 건강 문제를 예방하기보다,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취약함이 드러날 수 없는 환경에서는 회복의 시작점도 함께 사라진다.

질병은 말할 수 있어도 취약함은 숨겨야 하는 사회는, 건강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취약함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회복이 필요한 상태의 신호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해석하는 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숨긴 채 버티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건강을 회복의 관점에서 다시 논의하기 위해서는, 질병뿐 아니라 취약함이 말해질 수 있는 조건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